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친애하는 나의 트라우마에게카테고리 없음 2024. 11. 15. 17:38
아니 평생 일기도 이렇게 써 본 적이 없었는데
여기 완전 내 일기장이네 ㅋㅋㅋ
어린 시절부터 방치되어 온,
상처로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이야기를
상담 선생님과 나눈 적이 있다.
선생님.
저에게 모든 감정들을 다 꺼내고 나면 남는 메인 감정은
외로움인 것 같아요.
근데 이게 되게 블랙홀 같아요.
엄청 크고 빠른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어서
제 주변에 모든 걸 다 빨아들이는 느낌이거든요.
그 깊이가 어느정도인지도 잘 모르겠고
어디서 생겨났는지도 잘 모르겠어요.
제 외로움은 회색 크레파스를 꾸역꾸역 집어먹는 기분이 들게 해요.
근데 피를 토하는 맛이 나요.
어디서 시작되었을까...
제 기억에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억은
제가 그 키워준 부모님 집에 맡겨지는데 엄마가 가버려서
제가 엄마 엄마 그러면서 엉엉 울어요.
그리고 이건 제가 친부모님 집으로 완전히 넘어왔을 때 생긴 일인데
아침부터 아빠가 화가 나서 막 소리쳐서
무서워서 도망쳐 나왔거든요.
근데 갈 곳이 없어서 조금 걷다가 옥상으로 올라갔는데
거기에 큰 접시 같은 게 엎어져 있었어요.
그래서 거기 밑에 들어가서 한참을 숨어있다
집에 돌아왔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되게 외로웠던 거 같아요.
제 처절한 외로움이 그 때부터 시작된 거 같아요.
"그럼 그 때 아버지가 무슨 이유로 화를 내셨는지 기억나요?"
아뇨... 그냥 큰 소리로 화냈던 것만 생각나는데요.
"그때 있었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.
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, 무섭지만 혼자라는 느낌이 안 들면
트라우마로 발전 안 하기도 하거든요."
생각해 보니 옥상으로 도망쳤을 때 정확하게
무서움 + 혼자라는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.
그런가? 이게 나한테 트라우마로 남았었나..
웃긴 게 난 그 이후로도 그 옥상에 자주 올라갔었다.
뭐 나쁜 생각을 가지고 그랬던 건 아니고
학생 때는 문제집이나 읽을 걸 들고 가 시간을 보냈고
어른이 되고 나서는 맥주 한 두 캔을 들고 올라갔다.
하루는 달이 예뻐서, 또 하루는 그냥 집에 있기 싫어서.
그 넓고 탁 트인 공간에서 씁쓸하지만 어쩐지 위로받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
거의 매일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.
선생님이 그러시더라.
내 탓이 아니었다고.
약할 수밖에 어린시절에 큰 어른이 소리치니까
당연히 무서울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.
뿌애애앵그러면 한 번 트라우마가 생겼으니까
그냥 평생 안고 가야 돼요?
전 이 외로움이 이젠 버거운데요..
절 먹어치워 버릴 거 같아요. 힘들어요.
그랬더니 선생님이 트라우마가 약해지는 조건 3가지를 알려주셨다.
첫 번째, 당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가능한지.
(그때의 상황은 나 때문이 아니라 나쁜 상황에 내가 있었을 뿐이라고.)
두 번째,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는지.
그리고 세 번째,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었는지.
이렇게 세 가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.
다행히 지금 이 트라우마 녀석들은 약해졌다.
내가 엉엉 울고 있을 때 집 밖에선
엄마가 그 소리를 들으며 입을 틀어막고 소리 죽여 울었던 걸 알게 되었고,
옥상은...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렸다.
어른이 된 내가 그때의 어린 나에게 다가가 꼭 안아주는 상상을.
예전 같았으면 절대 물어보지 못했을 텐데
이젠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.
내가 이런 상처가 있었는데 엄마도 알고 있었냐~
엄마는 그렇게 생각했구나~
그리고 신기한 게 언젠가부터 옥상은 안 가게 되었다.
어떻게 이미지 상상만으로 예전에 받은 상처가 없어져?
싶지만 마음에 생긴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. 옅어질 수 있을 뿐.
근데 옅어지고 나니 훨씬 나아. 훨씬 좋아.
어쨌든 저 놈의 옥상은 이제 별로 가고 싶단 생각이 잘 안 든다.
(슈퍼문 뜨는 날이나 별똥별 떨어진다고 할 땐 또 올라감. 잘 보이거든 흐흐)이렇게 적어보니 눈물이 쬐끔 나긴 했지만
뿌듯하네.
트라우마 이 녀석들 충분히 약해질 수 있어요!
여담
옥상에서 날 숨겨준 접시는 이거였다. 옥상 안테나.
저게 왜 저 때 엎어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
저 이후에 올라갔을 땐 없어졌으니 아마 철거 예정인 애들이었나 보다.